습작과 망작의 방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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싫다

Note

  나는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무척 진귀하고 뒤죽박죽 시장바닥 같은 업무 처리 방식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. 평등한 구조에서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는 -말만 번지르르한- 곳에서 일하고 있다. 

  이 곳에서는 각자의 취향이 곧 업무의 방향이 된다. '일단 해 봐'로 모든 일이 시작된다. 일의 규칙과 범주는 더더욱 없다. 왜? 최종결정권자조차 그런 생각이 없으니까. 더 웃긴 건 최종결정권자가 프로젝트의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취향대로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이다. 그러니 실무자가 기획과 설정에 충실한 업무는 애초부터 할 수 없다. 실무자는 팀장의 눈치를 살피고, 팀장은 최종결정권자의 눈치를 본다. 자연스럽게 상관의 빌어먹을 '취향'을 파악해서 일을 하게 된다. 

  어떤 원화가는 '잘 팔릴 것 같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서' 그렸다고 말했다.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회사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 원화가가 기획이나 설정에 충실한 디자인이 아니라 '잘 팔릴 것 같은' 디자인을 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. 그리고 왜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왜 즉시 수긍하고 마는 것일까.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질식사 할 것만 같았다. 만약 그 원화대로 출시했는데 잘 팔리지 않으면 누가 책임질까? 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과 취향과 선호가 최종 결과물에 그대로 나왔는데 아무도 '왜 저렇게 했지?'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못 하는 것일까?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이유를 안다.


  비전이 없고, 목표가 없고, 기획이 없어서다. 더 나아가서는 비전이 없어서 그렇다. 이 회사의 비전, 이 게임의 비전이 아무 것도 없다. 


  적응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벌컥 솟아나는 걸 보면 이 회사에 적응하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. 그리고 이런 회사엔 절대 적응하고 싶지 않다.